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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레이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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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레이 소동은 1620년, 다테 히데무네의 명으로 얀베 세이베이 일가가 습격당해 몰살된 사건을 말한다. 재정난을 겪던 우와지마번에서 얀베 세이베이와 사쿠라다 겐바 간의 갈등이 원인이 되었으며, 얀베 세이베이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발생했다. 사건 이후 사쿠라다 겐바가 사망하고, 번에서는 얀베 세이베이의 원령을 달래기 위해 와레이 신사를 건립했다. 우와지마 지역에는 와레이 전설과 관련된 풍습이 존재했으나 현대에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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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레이 소동
개요
명칭한자: 和霊騒動
가나: われいそうどう
로마자 표기: Warei Sōdō
발생 시기간분 원년 (1661년)
발생 장소이요국 우와지마번
원인번정 개혁을 둘러싼 대립
결과야마자키 요시유키 등 가신단의 숙청
도미타 가게마사의 할복
배경
시대적 배경에도 시대 초기
지역적 배경이요국 우와지마번
전개
발단우와지마번 번정 개혁을 둘러싼 가신단 간의 대립 심화
주요 인물야마자키 요시유키 (우와지마번주)
도미타 가게마사 (가로)
스와 노부스케 (가로)
가와무라 젠베에 (가로)
사건 경과도미타 가게마사의 번정 개혁 추진
가신단의 반발과 야마자키 요시유키에 대한 모함
야마자키 요시유키의 가신단 숙청 및 도미타 가게마사의 할복
영향
정치적 영향우와지마번 번정의 혼란 및 야마자키 요시유키의 권력 강화
사회적 영향도미타 가게마사의 원령 숭배 확산
우와지마시 와레이 신사 건립
관련 시설
관련 신사와레이 신사

2. 사건의 경위

1614년, 다테 마사무네의 서장자 다테 히데무네이요우와지마번을 세우면서, 얀베 세이베이 킨요리가 필두 가로로서 번정을 맡았다. 그러나 번 운영을 둘러싸고 얀베 세이베이와 사쿠라다 겐바 모토치카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1620년 6월 29일, 비가 내리는 깊은 밤에 얀베 세이베이의 저택이 습격당했다. 이 습격으로 세이베이와 그의 차남, 삼남, 그리고 이웃에 살던 사위 시오노야 타쿠미와 그의 아들 2명이 살해되었다. 당시 9살이었던 세이베이의 넷째 아들 역시 와레이 신사 신전 뒤 우물에 던져져 살해되었으나, 세이베이의 어머니와 아내는 무사했다.

이 습격은 히데무네의 명령에 의한 "처벌"로, 사쿠라다 겐바 일파가 습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겐바 본인은 당일 오사카성의 석축 복원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히데무네는 이 사건을 에도 막부는 물론 다테 마사무네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마사무네는 중신 코오리 자에몬을 통해 히데무네를 힐문하고 근신을 명했다. 또한 막부에 우와지마번 개역을 탄원했는데, 이는 우와지마번을 지키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설도 있다. 히데무네는 막부와 마사무네에게 해명하고, 이이 나오타카에게 중재를 의뢰하여 개역을 면했다.

2. 1. 소동 전야

1614년, 다테 마사무네의 서장자 다테 히데무네이요우와지마번을 세우면서, 얀베 세이베이 킨요리가 필두 가로로서 번정을 맡았다. 우와지마번은 초기부터 재정난에 시달렸고, 번 운영을 둘러싸고 얀베 세이베이와 사쿠라다 겐바 모토치카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얀베 세이베이는 다테 마사무네의 신임을 받았으나, 히데무네는 사쿠라다 겐바를 중용하고 세이베이를 근신시켰다. 반(反) 세이베이파는 세이베이 암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도요토미 정권 시대부터 영주 가문이 자주 교체되면서 우와지마는 피폐해져 있었고, 번은 재정난을 겪었다. 히데무네는 아버지 마사무네에게서 6만 냥을 빌렸고, 그 변제는 1635년까지 계속되어 초기 우와지마번에 큰 부담이 되었다.

1619년에는 오사카성돌담 복구 보청을 맡았다. 번의 운영을 둘러싸고 얀베 세이베이와 사쿠라다 겐바 모토치카가 대립했다. 히데무네는 세이베이를 멀리하고 사쿠라다 겐바를 중용하고, 세이베이는 근신시켰다. 반 세이베이파는 히데무네의 생모 료젠인의 7주기 법요에서 세이베이를 독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2. 2. 습격

1620년 6월 29일, 비가 내리는 깊은 밤에 얀베 세이베이의 저택이 습격당했다. 이 습격으로 세이베이와 그의 차남, 삼남, 그리고 이웃에 살던 사위 시오노야 타쿠미와 그의 아들 2명이 살해되었다. 당시 9살이었던 세이베이의 넷째 아들 역시 와레이 신사 신전 뒤 우물에 던져져 살해되었으나, 세이베이의 어머니와 아내는 무사했다.

이 습격은 히데무네의 명령에 의한 "처벌"로, 사쿠라다 겐바 일파가 습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겐바 본인은 당일 오사카성의 석축 복원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히데무네는 이 사건을 에도 막부는 물론 다테 마사무네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마사무네는 중신 코오리 자에몬을 통해 히데무네를 힐문하고 근신을 명했다. 또한 막부에 우와지마번 개역을 탄원했는데, 이는 우와지마번을 지키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설도 있다.

히데무네는 막부와 마사무네에게 해명하고, 이이 나오타카에게 중재를 의뢰하여 개역을 면했다.

3. 사건 이후의 소동

1623년, 사쿠라다 겐바가 강풍에 의해 콘고산 쇼겐인 본당의 들보에 깔려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에도 얀베 세이베이의 정적들이 해난 사고와 낙뢰로 잇따라 사망했다. 우와지마번 가로 카미오 카게유는 우와지마성 북쪽에 작은 사당을 지어 미코다마묘진(児玉明神)으로 불렀다. 그러나 히데무네는 병상에 누웠고, 히데무네의 6남 토쿠마츠, 장남 사콘노타이후 무네자네, 차남 사쿄노스케 무네토키가 잇따라 사망했다. 집안뿐만 아니라 기근, 태풍, 대지진 등 재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재앙이 "세이베이가 원령이 되어 원한을 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히데무네는 1653년에 노송나무 숲에 신사를 건립하고 교토 요시다가의 봉폐사를 초청해 야마요리 와레이 신사(山頼和霊神社)라고 하였다. 1731년에는 5대 번주 다테 무라토키가 세이베이의 저택 터에 와레이 신사를 창건하여 세이베이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4. 우와지마의 풍습

우와지마의 아이들은 모기장을 치는 계절이 되면,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와레이 전설을 듣고, 습격일 당일 밤에는 모기장을 치지 않는 풍습을 행했다. 모기장의 보급은 근대부터 시작되었으며, 풍습 자체도 비교적 최근의 것이지만, 모기장의 유행이 쇠퇴하고 있는 현대에는, 이 풍습도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5. 비고

1986년 에히메 신문에 얀베 가문과 사쿠라다 가문 당주들이 "그런 전설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게재하여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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